서론: 이해하기 힘든 에너지 정책의 모순
"2050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재생에너지 보급을 대폭 늘리겠습니다."
"안정적인 전력 수급을 위해 천연가스(LNG) 발전소 건설을 확대합니다."
최근 뉴스에서 이런 상반된 메시지를 동시에 접하며 고개를 갸웃거린 분들이 많을 겁니다. 한쪽에서는 풍력, 태양광 같은 친환경 에너지 확대를 외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화석연료인 가스 발전소를 더 짓겠다니. 마치 다이어트를 선언하고 디저트 뷔페를 예약하는 것처럼 모순적으로 들립니다.
이러한 정책 방향은 '친환경 에너지'와 '안정적 전력설비'라는 두 가치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복잡한 방정식 속에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거대한 그림, 바로 '수소 생태계'로 나아가는 전략적인 셔플이 숨어있습니다.
오늘은 왜 '가스 산업의 확장'이 역설적으로 '수소 생태계 개화'에 긍정적인 신호인지, 그리고 이 모순적인 상황이 대한민국의 탄소중립 로드맵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1. 친환경 에너지의 딜레마: '변덕'과 '안정성' 사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태양광, 풍력과 같은 100% 친환경 재생에너지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간헐성(Intermittency)', 즉 자연의 변덕에 따라 전력 생산량이 급변한다는 점입니다.
- 태양광: 해가 떠 있는 낮에만, 구름이 없을 때만 발전이 가능합니다.
- 풍력: 바람이 적절하게 불어줄 때만 터빈을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기를 가장 많이 쓰는 저녁 시간이나, 장마철, 바람 없는 날에는 전력 생산량이 뚝 떨어집니다. 만약 전력망 전체가 이처럼 변덕스러운 재생에너지에만 의존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전력 공급이 수요를 맞추지 못해 도시 전체가 암전되는 '블랙아웃'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안정적인 전력 시스템을 위해서는, 재생에너지가 힘을 못 쓸 때 즉시 투입되어 전력 공백을 메워줄 '믿음직한 구원투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2. 왜 '천연가스'인가? 현실적인 징검다리, '브릿지 에너지'
그렇다면 왜 하필 구원투수가 '천연가스(LNG)'일까요? 석탄이나 원자력도 있지 않을까요?
- 석탄: 탄소 배출량이 너무 많아 기후위기 시대에 더 이상 확대하기 어렵습니다. -
원자력:
- 탄소 배출은 없지만, 건설 기간이 길고 사회적 수용성 문제가 있으며, 출력을 유연하게 조절하기 어려워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 천연가스(LNG) 발전은 다음과 같은 장점을 가집니다.
- 낮은 탄소 배출: 석탄 발전에 비해 탄소 배출량이 절반 수준입니다.
- 높은 유연성(급전성): 필요할 때 신속하게 출력을 높이고 낮출 수 있어, 재생에너지의 들쭉날쭉한 생산량을 보완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 성숙한 기술: 이미 전 세계적으로 검증되고 안정성이 확보된 기술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천연가스는 완전한 탈탄소 사회로 가기 전까지, 재생에너지의 불안정성을 보완하며 에너지 시스템의 다리 역할을 하는 '브릿지 에너지(Bridge Energy)'로 불립니다. 최근 발표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실무안에서 LNG 발전 설비가 증가한 것 역시 이러한 현실적인 고민의 결과물입니다.
3. 가스 산업 확장이 '수소 생태계'의 문을 여는 이유
여기까지는 '안정적인 전력 수급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진짜 핵심은 그다음입니다. 현재의 가스 산업 투자가 미래 수소 경제의 씨앗이 된다는 점입니다.
1) 수소 생산의 현실적 출발점, '그레이/블루 수소'
이상적인 '그린수소'는 물을 재생에너지 전기로 분해해서 만드는 100% 청정 수소입니다. 하지만 아직 생산 단가가 매우 비싸고, 대량의 재생에너지 전력이 필요해 당장 경제성을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현실적인 대안은 천연가스(주성분: 메탄, CH₄)에서 수소(H₂)를 추출하는 방식입니다.
- 그레이수소: 천연가스에서 수소를 추출하고, 부산물인 이산화탄소(CO₂)를 그대로 대기에 방출하는 방식입니다. 현재 생산되는 수소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 블루수소: 그레이수소와 동일한 방식으로 생산하되,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CCUS(탄소 포집, 활용, 저장) 기술로 붙잡아 대기 중 유출을 막는 방식입니다.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인 저탄소 수소로, 그린수소 시대로 가는 중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합니다.
즉, 안정적인 천연가스 공급망과 관련 인프라가 있어야만, 경제성 있는 블루수소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초기 수소 경제를 열 수 있습니다.
2) 기존 인프라의 재활용, '수소 혼소 발전'
더욱 중요한 연결고리는 발전소 자체에 있습니다. 새로 짓는 LNG 발전소의 가스터빈은 기술적으로 '수소 혼소(Co-firing) 발전'이 가능하도록 설계되고 있습니다.
수소 혼소 발전이란, 기존 LNG에 수소를 20~50% 섞어서 함께 태워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엄청난 장점을 가집니다.
- 점진적 탄소 감축: 수소를 섞는 비율만큼 탄소 배출량을 즉시 줄일 수 있습니다.
- 인프라 투자비 절감: 완전히 새로운 수소 전용 발전소를 짓는 대신, 기존 LNG 발전소를 일부 개조하여 활용하므로 막대한 초기 투자 비용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 수요처 확보: 대규모 수소 수요처인 발전 부문이 생겨나면서, 수소 생산 및 공급 분야의 투자를 촉진하는 마중물 역할을 합니다.
결국 지금 짓는 LNG 발전소는 단순히 가스를 태우는 시설이 아니라, 미래에 수소를 태울 '수소 발전소 예비 후보'인 셈입니다.
4. 궁극적인 목표: 100% 무탄소 시대를 향한 '그린수소'
이 모든 전략의 최종 목적지는 당연히 '그린수소'입니다.
[ LNG 발전 확대 (브릿지 역할) ] → [ 블루수소 생산 및 수소 혼소 발전 (인프라 구축 및 기술 성숙) ] → [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 및 단가 하락 ] → [ 그린수소 대량 생산 및 100% 수소 발전 전환 ]
이러한 전략적 로드맵을 통해 우리는 값비싸고 불확실한 미래 기술에 '올인'하는 대신, 현재의 기술과 인프라를 지렛대 삼아 점진적이고 안정적으로 탄소중립 목표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결론: '친환경 vs 전력설비'는 모순이 아닌, 전략적 로드맵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가스 발전을 늘리는 것은 친환경 정책에 역행하는 것일까요?
단기적인 시각으로 보면 모순이지만, 에너지 전환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보면 이는 매우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로드맵입니다. 가스 산업 확장은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보완해 '안정적인 전력망'을 유지하는 동시에, 기존 인프라를 활용하여 '수소 생태계'라는 미래 에너지 시스템의 문을 여는 열쇠 역할을 합니다.
'친환경 에너지'와 '안정적 전력설비'는 대립하는 가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수소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를 보완하며 함께 성장하는 파트너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마주한 이 복잡한 에너지 전환의 퍼즐은, 모순을 이해하고 그 속에 숨겨진 큰 그림을 읽어낼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본 게시물은 2025년 6월까지 공개된 정부 정책 및 관련 산업 정보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으며, 특정 정책이나 기술에 대한 투자를 권유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